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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줏었다

이래도 <디워>에 욕만 할 것인가

by 고창달맞이꽃 2007.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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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현의 영화로 보는 세상] '심형래가 아는 한 명뿐인 기자'의 생각 (2)

-이래도 <디워>에 욕만 할 것인가-

솔직히 질적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누군가 이렇게 물었다.

“같은 사람이 <트랜스포머>는 단순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컴퓨터그래픽이 볼 만한 영화 , <디워>는 화려한 컴퓨터그래픽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스토리가 문제라고 쓴 것은 두 영화 사이에 '그래도' 질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 아니냐.”

이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이랬다.

“물론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트랜스포머>와 <디워>의 상반된 말의 배치는 그 단순함의 질이 다르다는 개념의 문제가 아닙니다. 태도의 문제이지요. '반이나 남은 술'과 '반밖에 남지 않은 술'과 같은 것이지요. 긍정적 태도와 부정적 태도가 작은 질의 차이에서 나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 <디워>에 대한 혹독한 비평은 태도의 문제다. 방송에서 천박하게 '꼭지가 돈다'는 상말까지 써가며 심형래 감독을 비웃은 한 문화비평가나 '미국 토스터기 모방품' 으로 비하한 한 영화감독의 태도는 <디워>의 부족함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디워> 존재 자체가 불쾌한, 그래서 존재 자체를 무시하고 싶은 태도로 보여진다.

그것은 그들이 끝없이 반복하는 두 단어로 짐작할 수 있다. 하나는 '없다' 이다. '서사가 없다' '플롯이 없다' '설득력이 없다' '변신에 이유가 없다' '미학이 없다' 등등. 심형래 감독의 과거 유행어 '영구 없다'를 비꼬는 듯한 이 '없다'는 단정은 결국 <디워>가 600만명의 관객을 돌파했고, 그 대부분이 “재미있네”라며 오락상품으로서 영화를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 가치를 부정하려는 태도이다.

물론 그들도 <디워>의 오락성 시장성은 부정할 수 없기에 한편으로 '있다'를 강조한다. '애국주의가 있다' '민족주의가 있다' '바보 영구의 인간적 호소가 있다' '인간극장의 마케팅이 있다'고. 오직 이 영화 외적 요소들만으로 그들은 <디워>의 흥행을 설명하려 한다. '이상 징후, 이해할 수 없는 기현상'이란 표현이 그것이며, <디워>에 만족한 관객들이 분노하는 것도 그 말 속에 숨어있는 '바보들'이란 비아냥거림을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 성격이나 감정, 사사로운 이익이나 위선에서 나온 것이든, 아니면 가치관과 교육에 의해 나온 것이든 태도는 바꾸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디워>에 대한 '없다' 와 '있다'를 고집할 것이다. 결코 영화로서 <디워>를 인정하지 않고 언제나 '기(奇)'나 '이해 불가능'이란 말을 붙일 것이다. 문제는 그 단어 자체가 논리성을 결여한 것이며, 논리적 설명을 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런 태도로 <디워>를 보고 있기에 <디워>의 흥행현상도, 곧 다가올 더 큰 폭발도 논리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들은 <디워>에는 서사가 없다고 비판한다. 왜 서사가 없는가. <디워>는 이무기 전설을 현재화했다. 500년 만에 환생한, 여의주를 지닌 한 여자와 그것을 빼앗아 용으로 승천하려는 악의 이무기의 대결. 이런 영화에 서사가 중요하냐 아니냐는 다음 문제다. 다만 <디워>는 그 서사를 보다 쉽고 정교하게 풀어내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 이유를 과도한 컴퓨터그래픽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책임을 엉뚱한 곳, 그것도 이런 장르영화의 중요한 흥행요소에 돌리는 것이어서 위험하다.

“왜 500년 후의 환생이 하필이면 미국인이냐”는 반문은 미국인 관객이라면 가능하다. 그들은 인간이 죽으면 언제, 어디서, 어떤 존재로든 심지어 식물로도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동양의 불교윤회사상을 모르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정반대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시사회에서 영화를 본 미국인들은 “독특하고 재미있다”고 말한다.

<디워>는 전설을 모티프로 했다. 비슷한 장르지만 화석에서 모기가 빤 피를 뽑아 공룡을 부활시킨 과학적 상상력을 동원한 <쥬라기 공원>과는 출발점부터 다르다. 그런데 그 전설과 현실의 결합에서 그들은 <쥬라기 공원>의 비과학적 태도는 외면하고 상상력에 박수를 보낸 것과는 정반대로, <디워>에서는 신화와 전설의 상상력은 무시한 채 현실의 리얼리티(설득력)만 비판한다. '갑자기'란 단어까지 써가며 착한 이무기의 등장과 위기의 해결을 비웃는다. 사실 이런 장치는 신화와 그 속의 영웅 이야기 자체는 물론이고, 선악의 대결구도를 그리는 대부분의 할리우드 영화가 차용하고 있는 공식이다. 바로 그 인간 능력 밖의 힘을 바라는 마음이야말로 인간이 신화와 전설을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디워>는 그 순간 전설이 아닌 현실이어야 할까.

<디워>와 심형래 감독이 “왜 우리만”이라고 하는 것은 10여년 충무로의 비웃음과 무관심을, 심형래 혼자 필름을 들고 외따로 떨어져 비행기에 오르던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괜한 피해의식이나 과장이 아니라고 확신할 것이다. <디워>에 관한한 장르의 특성조차 무시하는, 일관성 없는 비판이 여기저기 보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디워>는 뮤지컬도, 멜로도, 그렇다고 현실고발영화도, 시대물도, 작가의 색깔이 드러내는 예술영화도 아니다. 그야말로 오락용 괴수영화, SF영화다. 그것도 전설을 소재로 한.

영화에는 모든 요소가 중요하고, 그것이 균형을 이뤄야 하지만 장르마다 조금씩 차이가 난다. 멜로는 배우의 연기와 스토리가, 뮤지컬은 음악이, 역사물은 리얼리티가 중요하다. 그렇다면 <디워>같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각효과를 최대화 하는 컴퓨터그래픽 특수효과일 것이다. 때문에 스필버그조차 이런 영화에는 유명스타를 쓰지 않는다. 그러면 진짜 심혈을 기울여 창조한 주인공인 공룡과 그들의 액션이 주목을 받지 못하니까. 그런 점에서 <디워>는 심형래 감독의 능력을 떠나 올바른 선택을 한 셈이다. 아마 600만명은 그것을 보고 싶어 극장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한 여자를 잡는 데 그렇게 어마어마한 괴물과 전투가 필요한가라는 비판도 <디워>를 리얼리즘 시각에서 본 오류다. 관객에게 스펙터클한 장면을 통한 시각적 만족을 주려는 동시에 극적 긴장감을 높이려는 당연한 설정이다. 그럼 <반지의 제왕>에서는 왜 그 작은 반지 하나 때문에 수만 대군이 등장하는가. 그 반지가 세상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중요해서라고? 그럼 여의주는?

민족주의도 그렇다. 형평성도 없고 그 말 자체가 억지다. 영화가 단순한 상품과 다른 이유는 그 속에 가치관, 이념, 문화 등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로부터 한국영화를 지키려고 스크린쿼터 수호를 주장했을 때, 그 근거가 무엇이었나를 생각해 보면 자명하다. <스파이더맨>에서 처음과 마지막 주인공이 성조기 옆에 붙어있는 것은 무엇인가. 수많은 전쟁영화에서 미군들이 국가 연주 속에 성조기에 경례를 붙이는 마지막 장면은 왜일까. 국가대표도 아닌 박세리와 박찬호의 승리에 난리치는 태도는 또 뭔가. 한국영화가 칸영화제에서 수상하기를 그토록 열망했던 이유는 뭔가. 국가 없는, 국가주의 없는 영화란 없다.

설령 심형래와 <디워>가 의도적으로 애국주의에 기댔다고 하자. 마치 그것 하나로 600만명이 영화를 보러 갔다는 발상 자체는 어이가 없다. 이유는 영화관람은 시간적 경제적으로 고비용에 속하기 때문에 관객은 냉정하다는 객관적 사실을 무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만약, 지금으로서는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곧 개봉하는 미국에서 <디워>가 흥행에 성공할 경우에도 이를 애국주의로 설명할 것인가.

심형래의 인간적인 호소력(진중권은 이를 '인간극장'이라고 비꼬았다)도 그렇다. “심형래가 만들었으니 봐줘야 하지 않느냐”를 비판하려면 “임권택 영화니까 봐야 한다”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심형래는 코미디언 출신이고, 임권택 감독은 한국이 낳은 거장이어서? <천년학>은 예술이고, <디워>는 오락이니까 차원이 다르다고? 다른 것은 차원이 아니라 장르이고, 영화가 목표하는 길이다. 이 세상에 남의 돈으로 영화 만들면서 흥행을 노리지 않는 사람이란 없다. <천년학>이 어렵게 한길을 걸어온 임감독의 100번째 작품이라면, <디워>는 어렵게 한길을 걷고 있는 심형래의 작품이다. 완성도가 다르다고?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혹시 일부 평론가나 언론들이 감독의 무게에 짓눌려서 그런 건 아닐까. 아니면 그렇게 해야예술을 아는,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눈이 높다는 자의식 때문은 아닐까.

그 인간적인 것과 무게야말로 영화를 영화로만 보지 못하게 한다. 이런 영화들이 있다. 그 영화를 영화적으로 비판하면 마치 그 영화가 담고 있는 소재 주제 인물 의식을 비판하는 것으로 오해 받기 쉬운. 과거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그랬고, <화려한 휴가>가 그렇고, 임권택 감독의 영화가 그렇다. 단지 5ㆍ18을 다뤘다는 이유만으로 <화려한 휴가>가 완성도가 완벽한 영화는 아니다. 그런데 그 영화를 영화적으로 비판하면 마치 5ㆍ18민주화운동을 비판하는 듯한 분위기가 분명 존재하고 있다.

바로 이게 영화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디워>를 순 우리기술, 심형래, 첫 미국 대규모 개봉 등의 외부요인을 빼고 영화로만 보지 않는 이유다. 사람들이 “심형래 것이니까”하고 극장으로 가는 이유다. 그들이 “영화는 영화로 보라”는 말이 편의적 발상이라고 여기는 이유다.

<디워>는 분명 영화 그 자체로 흥행요인이 있다. 90분 간 컴퓨터그래픽의 시각효과로만 지금의 관객동원과 만족도를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캐릭터, 소재, 정서, 스토리에도 분명 흥행의 코드가 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애국주의, 민족주의, 인간적 호소력이 보태져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디워>는 또 분명 잘 만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심형래의 큰소리에 비해 부족하다. 그렇다고 눈 앞에 있는 것을 없다고 몰아치는 것은 <디워>의 내일을 위해서도, <디워>의 자리매김에도, 한국영화 발전에도 도움이 안 된다. 자존심도 아니다. 단지 오만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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